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애치슨 라인 (문단 편집) == 애치슨 선언의 배경 == 1949년 8월, [[미국]]의 [[중국]]학자 오웬 래티모어(Owen Lattimore) 교수는 [[미국 국무부|미 국무성]]의 위촉을 받고 제출한 [[남한]] 정책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a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309-310] >남한은 미국의 이익과 정책에 있어 자산이 아니라 부채이다. 오늘날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가 어느정도 지속될 것인가는 의문시되며, 따라서 미국은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의견서는 1950년 4월 [[미국 국무부]]에 의해 공포되었으며, 래티모어는 수일 후 [[미국 상원|상원]]에 출석하여 한국에 대한 원조 중지를 주장하였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1949년 12월 결의에서 "만약에 [[공산군]]이 남한에 대하여 [[6.25 전쟁|무력 침입]]을 행하더라도 미국은 남한에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다."라 의견을 밝혔다.[*a] 이처럼 당대 미국 정부는 여전히 한반도에서 얻을 지정학적 이익이 거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만약 소련이나 미국이나 [[한반도]]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애초에 [[분단]]이 될리도 없었을 것이다. 소련에게 한반도가 중요했으면 미국의 저항에도 기어코 [[제주도]]까지 밀고 내려왔을 것이며, 미국 또한 [[오키나와]]의 [[존 리드 하지|하지]]가 아닌 북지의 [[앨버트 웨드마이어|웨드마이어]] 장군을 곧장 한반도로 투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두 [[강대국]] 모두 소련은 [[만주]], 미국은 [[일본]]을 중요하게 여겼지 한반도는 전혀 그렇지 못했기에 결국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 오히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도래한 [[냉전]]의 긴장 속에서 [[소련]]이 태평양 방면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염려하여 [[대한민국]]에 충분한 무기도 제공하기를 꺼렸다.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선언은 이러한 미국 조야와 국무부의 분위기 속에서 발표되었다. 흔히 이 선언을 통해 [[한반도]], [[타이완 섬]], [[인도차이나 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포기한다' 라기보다는, 미국에 반드시 방어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연설문 원본에서도 알 수 있는데, 당시 애치슨이 소위 '애치슨 라인'을 가리키며 쓴 단어는 '방어선'이 아니라 '방어적 주위(defensive perimeter)'이다. 당시 애치슨 선언에 당황한 이승만은 장면 주미대사에게 조속히 애치슨과 접촉하도록 했으나, 애치슨이 의회 출석으로 부재중이라서, 윌리엄 버터워스(William Butterworth) 국무부 북동아시아 담당 차관보를 대신 만났다. 이승만은 한국을 애치슨 라인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한국 외무 장관이 주미 대사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미국은, 한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가 없어서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이, 한국의 방위를 포기하는게 아니라면서 원조를 약속했다. 이후 1950년 1월 26일 ‘대한민국정부와 북미합중국정부간의 상호방위원조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50년 2월 10일, 미국 의회는 한국 원조 법안을 통과되면서, 한국도 안심하게 된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11500329201001&officeId=00032|#]][[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6100032920102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6-10&officeId=00032&pageNo=1&printNo=1186&publishType=00020|#]] 또한 애치슨 라인 안에 들어간 지역을 보면 모두 미군이 직접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지역이다. 알류샨 열도는 미국령이었고, 필리핀은 당시 미국으로부터 막 독립한 신생국이었다.[* 이 때문에 미군 사령관인 맥아더가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기 전까진 미군 소속 필리핀군 고문직이었다.][* 또한 독립 직후부터 맺은 몇차례의 조약을 통해 [[주비미군|상당수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확고한 친미국가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이 가장 먼저 맺은 상호방위조약이 [[미비상호방위조약]]인 것은 이유가 있다.] 일본은 국권회복 이전으로 [[연합군 점령하 일본|연합군 점령하]]에 있었다. 반대로 한국의 경우 독립국인데다 자국의 군대도 있었기 때문에 애치슨 라인 안에 포함되었다면 오히려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섬임에도 불구하고 독립국이었던 타이완 역시 애치슨 라인에서 빠졌다. 본래 애치슨 라인의 진정한 목적은 국제분쟁 발생 시 [[미국 육군]]이 즉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세계 대전을 2번이나 연속으로 치뤘으므로 당분간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고, 현실적으로도 이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그로 인해 전후 급속히 군비를 축소하였고, 그로 인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러서는 [[미군]]의 [[군기]]나 장비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 이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논픽션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심지어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기지에 "기념물"로 둔 [[M26 퍼싱]] 전차까지 가져왔다고 한다. 당시 군축 탓에 보급이 시원찮아서 극동군에서 오키나와 등에 유기물자를 회수하여 부품으로 이용할 정도로 열악했던 것. 그 얼마 안 되던 퍼싱조차 일본 내 공장에서 급조하여 만든 저질 부속품 때문에 한국에 상륙한 뒤 얼마 안 가서 퍼져나가 전차병들이 환장했다고...][* 미국은 아니지만 6.25 전쟁에 참전한 캐나다의 경우에도 [[유엔]] 결의에 따라 파병하게 되었을 때 파병할 상비전력이 본토에 없어 새로이 지원자들을 모집해 부대를 편성, 훈련시켜서 한국으로 보냈을 정도였다. 당시 캐나다 참전용사 중 한분의 이야기를 다룬 국내 다큐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허쉬 가(家)의 둘째가 먼저 파병되었는데 얼마후 큰형도 자원입대해서 한국에 왔고 같은 중대에 속했지만 형제들은 이를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공군과의 격전에서 간신히 적을 막고 전사자들을 옮기는데 동생이 형의 시신을 발견했고 이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괴로워하던 동생은 나중에 별세하면서 부산의 UN군 묘지에 안장된 형과 함께 묻어 달라고 유언했고 결국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까지 이 사례가 전해져 동생의 유골이 형과 함께 안장되게 되었다. 본래는 배우자만이 허용되는데 동생도 6.25 전쟁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방위선으로 책정한 것이 애치슨 라인이었고, 애치슨 라인 밖의 지역은 안 지켜도 되는 지역이 아니라 직접적인 병력 주둔이 없어도 방어가 가능한 지역으로 간주한 것이다. 당시 제독의 반란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에는 [[항공모함]]도 필요없다고 간주하고 [[핵무기]]와 [[전략 폭격]]만으로도 충분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군부 역시도 비슷한 안건을 주장한 바 있지만 애치슨 라인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 [[미합중국 공군|미 공군]]은 핵무기와 폭격기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되므로 [[미합중국 해군|해군]]이 퍼먹는 예산이나 좀 줄이고 자기들 잘 봐달라는 식으로 홍보하고 있었으나 해군은 이에 반발하여 [[제독들의 반란]]이 발생하는 등 미군 내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미국의 유럽 외 지역에 대한 무지도 고려해야 한다.[* [[뉴욕]]이나 [[워싱턴 D.C.]]같은 미국의 심장부가 동부에 위치해 있고 유럽은 미국의 동부지역에서 대서양만 건너면 도착하는, 태평양 너머의 아시아보다 지리적으로 소련의 위협에 가끼이 노출된 상태다. 더구나 미국의 다수이자 주류를 이루는 [[미국 백인]]들은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온 유럽계 사람들이다.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보다 유럽에 대한 위협을 보다 심각히 여기는 것이다.] 1950년 1월 당시 구미 서방의 관점에서 제대로 근대화되었다고 할만한 군대는 동아시아 지역에선 사실상 전무했다. 그나마 근대화에 근접했던 일본군은 미군에게 처절하게 털린 끝에 아예 해체되었고, 미국이 지원해준 중국 국부군은 부정부패 끝에 고작 [[치하]] 따위가 중장비의 전부인 알보병 중공군에게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도주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딴에는 미국식 훈련 프로그램과 미국제 장비로 무장을 시켜주고 미군 고문이 직접 자문을 해주는 한국군 정도면 서방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신생국 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 6.25 전쟁 초기에 [[백선엽]], [[김종오]] 등 좋은 성과를 거둔 명장들의 성공 비결 중 하나도 미군 고문과의 원활한 소통이었다.] 이에 대하여 반론하자면, 이미 미국은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통해서, 북한군의 전력이 한국군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치슨 라인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라인 밖의 비(非)공산국가가 공산군의 침공을 받았을 경우, '''해당 국가가 적국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티는 동안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해당 국가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애치슨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결코 공산군의 침공에 저항하는 라인 밖의 비공산국가를 가만히 내버려두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고 본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보자면, 애치슨 라인 안쪽 지역들에 대한 안보 보장과는 어조가 완전히 다르며, 애치슨 연설에서 군사적 해결책은 부적절하다고 말하면서, 미군이 참전해서 개입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했다. 애치슨이 연설한 시점에서 [[미국 국무부]]가 가진 한국 관련 현안은 [[미국 의회]]에서 계류 중인 한국 원조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애치슨 선언 이후 [[북한]]에서 나온 발표의 내용은 "[[한반도|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미제국주의자를 비난한다'였다. '''즉 원조법안이 중요했다는 것.''' 그런데 당시 미국 의회는 극도로 예산 감축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신생국을 위한 직접적인 군대 파견과 같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정책 실시를 기피하고 있었다. 다만, 원조물자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시기들이 좀 미묘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애치슨 선언이 내포하는 의미란, 신생 [[대한민국]]은 미국이 약간의 원조금만 주면 자기 스스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국 의회에 보내는 것이었으며, 결국 한국 원조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애치슨은 이걸 자랑스러워했다. [[6.25 전쟁|하지만 한 달 뒤에 한반도에서는...]] 한국 정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감사전문을 보내고 외무장관이 환영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국방비를 포함한 정부 예산 일체를 아직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2년차 정부가 의례적으로 한 말이지 한국이 군사적으로 자립하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다. 여하튼 애치슨 라인은 실질적 의미는 적지만 그 당시 북한에게 사기 진작이 되는 명분을 주었고, "미국이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대해 자세한 파악을 하지 못했다!"라는 인상을 주어 한국 침공에 자신감을 가지게 하였으므로 까여도 어쩔 수 없다. 애치슨 선언의 의미를 군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미국은 한반도 유사시 이에 대응할 유의미한 전력을 갖춘 지상군을 신속 투입할 생각도 계획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게 중요한 게, 수천 수만의 인원이 장비를 다 갖추고 이동하는 것은 흔히 [[양판소]]에서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군대가 바로 움직인다는 설정과 달리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어떤 부대부터, 어떻게 이동시키고, 이에 대한 보급은 어떻게 하고 등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실제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 그래도 실행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일정이 지연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게 다반사다.[* 출동을 목적으로 설치된 [[119]]나 파출소/지구대조차 장비 갖추고 지원 요청하고 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병사 개인이 40kg을 짊어지고 가야하는(이건 창칼 쓰던 시대도 마찬가지) 군대가 출동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긴급한 연락이 왔을 때 직장이든 집에서든 1분 안에 준비해서 현장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실제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급하게 투입된 스미스 대대 및 이들의 상위부대인 미 24사단이 [[대평리-공주 전투]]에서 전력을 손실한 채 치른 [[대전 전투]]에서 참패한 것도 급하게 투입되느라 전력을 다 갖추지 못한 것이 한 이유다. 평시에 작계를 만들고, 심지어 비밀로 꽁꽁 감춰두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2차대전 이후 [[일본]]은 사실상 [[연합군 점령하 일본|미국 군정의 식민지]]였으므로 미군 입장에서 애치슨 라인의 의미는 대만과 한국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전쟁터로 판단, 군시설을 집중시키지 않고 전쟁터의 배후지로는 과거 식민지였던 필리핀(대만의 배후지)과 현재 식민지인 일본(한국의 배후지)을 활용한다는 전략을 선언한 것이다. 또한 애치슨 라인에 일본, 필리핀은 지리적 위치상 태평양과 바로 직결되었고 아무리 군축 바람이 불어도 그것은 곧 하와이와 미국 본토로 직결되는 문제인데다 일본은 본토를 지킬 육군도 없었으니 미 육군이 직접 투입해서 공산권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할 필요가 있어서 포함시킨거고 대한민국, 대만, 남베트남은 태평양하고 직결되지도 않았고 일본과 필리핀이 배후에 있으니 미국은 해공군만 지원하고 육군은 현지에서 잘 훈련시키면 된다는 판단으로 제외시킨 것이다. 여기서 미국 정부와 미국 군부의 입장이 달라지는데 정부는 정상화 정책으로 2차대전 이전으로 군대 규모를 감축하기 위해 완전 철수를 원했고 군부는 즉각 반격 규모의 병력 유지를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군부의 입장이 맞았던 것으로 판단되면서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고 케네디 때는 "미국에는 화이트 하우스와 펜타곤이라는 2개의 정부가 있는 것 같다"고 불평을 터뜨릴 정도까지 갈등이 심화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